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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수'의 '비적'은 항일군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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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연대 댓글 0건 조회 1,766회 작성일 07-10-1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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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수'의 '비적'은 항일군 확실
글쓴이:희망연대2007-10-11 15:11:35
유치환 '수'의 '비적'은 항일군 확실
현대사연구 전갑생 씨, 일본 사료 조사 결과 기고
2007년 09월 05일 (수) 전갑생 webmaster@idomin.com
<경남도민일보>는 지난 2004년 10월 11일 전갑생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의 연구결과를 인용, 유치환의 시 '수(首)'에 나오는 '비적(匪賊)'이 항일독립군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유치환을 옹호하는 이들은 여전히 '비적(匪賊)'은 '단순한 도둑떼일 뿐'이라며 '수(首)'가 친일시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전갑생 위원은 최근 일본을 방문, 당시 일본이 항일독립군을 '비적(匪賊)'으로 불렀는지 여부를 조사해 그 결과를 본보에 보내왔다.
  
 
 
 
 

유치환의 '수(首)'에 나오는 '비적'을 놓고 몇 년째 친일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또한 내년 유치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통영시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은 통영시가 친일작가 키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필자는 과연 그가 친일문인인지 아닌지, 다시금 '수'를 통해 따져보고자 한다.

필자는 최근 일본의 방위성 방위연구소, 국립국회도서관,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직접 방문하여 사료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는 고 임종국 선생이 주장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고, 약 3년간 필자가 주장한 대로 '비적(匪賊)'은 항일군이었음이 확실하기에, 그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유치환 거주지는 동북항일연군의 무대 = 도쿄 메구로구 나카메구로(東京 目黑區 中目黑)에 소재한 방위성 방위연구소는 한말부터 해방될 때까지 육·해군 문서 약 15만책을 소장하고 있다. 필자는 만주 일대에서 항일군들을 토벌한 관동군사령부의 보고서와 사료들을 발굴했다. 이 사료는 유치환이 거주한 빈강성 연수현(濱江省 延壽縣)을 비롯한 하얼빈(哈爾賓), 동흥현(東興縣) 등지의 '비적'이 항일군임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또 수(首)에 나오는 '가성네거리에 내걸린'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짐작게 한다.

방위성 만주자료 등 440책 분석…일반도둑 효수했다는 내용 없어

처음 발굴한 자료는 관동헌병대 하얼빈헌병대장 가토(哈爾濱憲兵大將 加藤圭二)가 작성한 보고서이다(1940. 4. 14, 哈憲高 제271호 思想對策月報에 관한 건 보고 '통첩').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 3월 1일 오전 6시경 항일군인 장조인(莊祚人) 외 수십 명이 하얼빈 곽후기팔리촌(郭後祺八里村) 입기비구(立祺碑區) 화요둔(火燒屯)에 만주군을 공격하고자 도착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주군경 30명이 즉각 출동하여 오후 1시에 장조인 부대와 8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항일군 2명이 사살당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두 번째 자료는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동북항일연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하얼빈에서 벌어진 내용이다. 1940년 10월 11일 오후 1시 10분 빈강성 서부인 경원동남방(慶源東南方) 송화강(松花江)인근 오목대(敖木臺)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제12지대 한옥서(韓玉書, 제3로군 정치주임) 등 100여 명이 대규모 연합 작전을 펼쳤다. 이날 일본군 제4군관구 교도보병 제4단, 만주경찰, 일본군본부 부대 등 202명과 항일군 100여 명이 혈전을 벌였다. 결국 항일군은 지휘관 한옥서, 부관 매서개(買西介), 36대대장 관수마(關秀烏), 35대대 유격대장 쌍협(雙俠)을 비롯하여 소대장 4명이 사살당하고 대원 34명이 전사했다(만주일보, 1940. 10. 16, 치안부참모사 발행 <鐵心>, 1940. 10월호). 또한 10월 25일 만주국 대신이 참전한 부대에 상금 7000원을 주었으며, 만주군 기관지와 <만주신문> 등에 '성공적인' 전투임을 선전했다.

추가로 발굴한 자료는 1941년 5월 31일 관동군참모본부에서 작성한 '비적정보월보 제4호(匪賊情報月報 第4號)'라는 채색지도로 조선인 항일군에 관한 내용이다. 이 지도는 이 시기 만주 전역에 1360명의 '비적'(항일군)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일성 부대가 간도성을 비롯해 하얼빈 인근까지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에 따르면, 1941년 5월 25일 밤 8시경 빈강성 동흥현 후삼택 동쪽 약 3km 지점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2지대장 박길송(朴吉松) 부대원 40명, 장광적(張光迪) 부대원 20명 등 총 120명이 전투를 벌였고, 유치환이 거주한 연수현에서도 20명의 만주군과 혈전을 벌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이 시기 하얼빈과 연수현 등지에서 동북항일연군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적'으로 불렸던 그들은 무장항일독립군임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작은 가성 네거리 효수된 비적' 동북항일연군서 활동한 항일군

◇항일군, 사살당하고 효수되다 =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항일군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바로 그들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항일군이다. 앞에서 사살된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은 총살되거나 전사하면 일본군에 의해 목이 잘려 나무에 걸렸다는 게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 사례를 찾아보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장 양정우(楊靖宇, 중국인)는 1940년 2월 몽강현 삼도위자에서 일본토벌군에 포위되어 투항을 거부하다가 사살됐다. 그의 시신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가 잘려 몽강현에 걸려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1998, 226쪽). 또한 경북 선산군 출신인 허형식(許亨植)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3군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2년 8월 3일 경성현(慶城縣) 청풍령(靑風嶺)에서 만주국군 토벌대에 포위되어 사살되었다(김인식,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2001, 역사비평). 그 이후 일본군에 의해 양정우처럼 효수되어 나무에 걸렸다.

따라서 동북항일연군 12지대 지휘관 한옥서를 비롯한 간부급도 허형식처럼 효수되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음이 자명하다.

특히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방위성 방위연구소 등에서 만주와 관련된 <육만밀대일기>, <육만기밀대일기>, <육만진대일기> 1940~1945년까지, 육군일반사료 중 만주와 관련된 자료 총 440책을 살펴본 결과, 일반 도둑이 항일군처럼 효수되어 나무에 걸려 선전전으로 이용되었다는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관동군 사령부의 각 부대에서 편찬한 <진중일지>와 각종 보고서를 봐도 일반 도둑이 효수되었다는 사실은 찾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치환의 '수'에 나오는 '비적'은 일반 도둑으로 볼 수 없으며 항일군임이 명확하다고 하겠다.

하얼빈협화회 총무 유치환, 항일군 토벌 직접 참여 추정

◇'수', 친일로 재평가 받아야 = 유치환의 시 '수'는 항일군을 조소하는 마음을 담은 친일시다. 일부에서 '비적'을 두고 하는 말처럼 "글자 그대로 떼 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가 아니라, 유치환의 거주지에서 만주 전역까지 독립을 쟁취하고자 무장 투쟁한 항일군의 총칭이라고 하겠다.

일본·만주군경은 '비적'을 '사상비(思想匪)'와 '토비(土匪)'로 나누었다. '사상비'는 '공산비(共産匪)'와 '항일비(抗日匪)'로 각각 나누어 불렀다. 그들이 '작은 가성네거리'에 효수되어 내걸린 것이다.

또한 1939년부터 협화회에 소속된 조선인들은 동북항일연군 등을 토벌하는 데 선무공작대원으로서 산악을 누비고 다녔다. <선무반원명부(宣撫班員名簿>(1939. 3. 10 현재)에서는 협화회 소속 조선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43년 하얼빈협화회 총무로 근무한 유치환도 선무공작에 직접 나섰으리라 추측된다.
 

  

지금까지 유치환은 '수'를 비롯한 3편의 친일시를 친일잡지에 게재하였으며, 만주국 협화회에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일문인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 통영시장은 "유치환의 시 중에서 제일 좋은 시가 '수'"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으며, 그의 형 유치진까지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다시 유치환을 옹호하고 기념사업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가 만주에 있으면서 항일시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항일독립군의 효수된 머리를 보고 조소했던 인물을,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파' 시인으로 영원토록 기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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